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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 가라사대 '아이폰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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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10,800  | 작성일2013.10.0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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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n Steve Said, ‘Let There Be an iPhone’

By FRED VOGELSTEIN
Published: October 4, 2013 

Campbell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55 마일 길은 정말 멋지다. 산타 크루즈 산맥 동쪽과 인접한 광활하고도 비어 있는 고속도로인 Junipero Serra Freeway를 지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자기 페라리 자동차의 속도 테스트를 벌이는 실리콘 밸리 신생 기업 창업자들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휴대폰이 정말 안 터지는 최악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앤디 그리 고(Andy Grignon)에게는 2007년 1월 8일의 순간을 되새길 완벽한 장소였다.

그가 원래 출근하는 길이 이 길은 아니다. 그는 Campbell 서쪽 동네에 있는 쿠퍼티노의 애플 수석 엔지니어였다. 그의 아침 출근길은 7 마일 정도, 15분 거리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의 보스이자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쇼에서 역사를 만들 스티브 잡스를 보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애플 팬들은 그동안 아이포드 안에 휴대폰 넣어주기를 잡스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그래야 두 가지의 기기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잡스가 그날 그 소원을 채워줄 작정이었고, 그리과 그의 동료들은 근처 호텔에서 밤을 보낸 후, 그 다음 날 오전 10시에 다른 이들과 같이 잡스가 첫 번째 아이폰을 선보이는 광경을 지켜 봤다. 

하지만 북쪽으로 운전해 가는 느낌이 별로 흥분되진 않았었다. 오히려 무서웠다. 실리콘밸리에서 무대에서 선보이는 제품 대부분이 잘리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인터넷과 통신망 때문에 좋은 프레젠테이션이 왜 잘릴까? 그래도 잡스는 생방송을 고집했다. 그래야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제품 시연 중에 눈에 띄는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잡스 전설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그리처럼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한 스트레스가 없었다.

그리은 아이폰의 모든 주파수 대역의 라디오파를 맡은 관리자였다. 정말 큰 일이었다. 오늘날 휴대폰은 정말 유용한 존재이지만, 제일 기본 기능은 송수신 라디오였다. 그리은 전화기가 전화기일 수 있게 만드는 장비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만약 통화가 안 된다거나 블루투스 헤드셋이나 와이파이가 안 되는 경우 그리은 답변을 해야 할 위치였다. 아이폰 초기 엔지니어 중 하나로서, 그는 2년 반(종종 1주일 내내였다)을 이 프로젝트에 투신했다.

그리은 아이폰 리허설 팀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잡스가 9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하는 광경을 많이 봤지만, 실수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잡스는 5일 내내 기조연설을 연습했고, 심지어 리허설 마지막 날에 아이폰은 여전히 통화가 잘 안 되거나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고, 얼어서 꺼야 할 때가 있었다. 그의 말이다.

"처음에는 리허설 자체가 정말 멋진 일이었어요. 뭔가 선택됐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정말 참가가 허락된 인원은 소수였습니다만, 순식간에 그 느낌이 불안으로 바뀌었습니다. 잡스가 그토록 분노했을 때를 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는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단히 직접적이고 크고 엄중한 목소리로 '네가 내 회사를 [욕 삭제]되게 만들었어'라거나 '우리가 실패하면 너 때문이야'라 말했습니다. 그토록 진지했었죠. 키가 1인치로 줄어드는 느낌이랄까요." 

리허설에 참가했던 다른 이들처럼 그리 고도 실제 프레젠테이션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잡스는 단순히 비난에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시연을 100번 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매번 뭔가 문제가 생겼죠. 좋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최고 기밀 사항이었다. 목요일부터 그 다음주 말까지 애플은 모스코니(Moscone)를 모두 다 잡고 있었고, 무대 뒤에 애플은 아예 전자 연구소를 설치하여 아이폰을 테스트했다. 그 옆에는 잡스를 위해 소파가 설치된 휴게실을 세웠다. 이들 방 앞과 빌딩 주변에는 하루 24시간 내내 보안 경호원 열 댓 명이 서 있었다. 자신의 전자 체크 카드를 가지고 와서 잡스가 개인적으로 승인한 목록과 비교해서 통과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잡스가 리허설을 하는 곳은 소규모의 간부들만 볼 수 있었다. 잡스가 워낙 누출에 대해 집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애플이 고용한 모든 계약직들(부스를 담당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의 조명, 음성을 맡는 이들)마저 프레젠테이션 이전에는 모스코니 안에서 잠자게 하려 했지만, 보좌진들이 겨우 잡스를 설득 시켜서 그 일만은 막았다.

그리 고은 아이폰이 평범한 제품 발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폰의 발표가 그렇게 중대한 순간이 될지 아는 이는 없었다. 7년 동안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이제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중대한 혁신의 반열에 올랐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더부룩했던 휴대폰 업계를 뒤바꿨다. 새롭고 거대한 이윤이 남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플랫폼을 제공한 것이 아이폰과 아이패드며, 모바일 앱은 2008년 판매를 시작한 이래, 10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고, 이는 수 십억 달러의 개인용 컴퓨터 업계를 뛰어넘는 실적이었다. 아이패드 판매를 데스크톱과 노트북에 포함한다면, 애플은 현재 지구상 최대의 PC 업체이다. 지난해 팔린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전세계에서 팔린 자동차의 두 배 이상인 2억 대 이상이다. 

그 충격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기도 하다. 애플의 혁신에는 인간이 머신과 어떻게 감응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단순히 마우스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우리 두뇌의 확장이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다. 책과 신문, 전화기, 라디오, 테이프 녹음기,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나침반, 텔레비전, 비디오, DVD, 개인용 컴퓨터, 휴대폰 비디오 게임, 아이포드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보시라. 스마트폰은 이들 모두를 주머니 안에 집어 넣었다. 게다가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 의사가 환자들을 다루는 방식, 우리가 여행하고 탐색하는 방식을 스마트폰이 바꿔버렸다. 오락과 미디어 접근과 경험 또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됐다.

그런데 애플은 여전히 포위돼 있다. 2007년 하순, 구글이 안드로이드 모바일 기기 및 휴대폰으로 세상을 지배할 계획을 발표했을 때, 구글은 아이폰과의 경쟁만 벌이려 하지 않았다. 구글은 실제로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성공을 거뒀다. 2010년부터 안드로이드는 유명세를 폭발적으로 확장 시켰으며, 구글의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80%에 달하고 있으며 애플은 20% 이하로 줄어들었다. 아이패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이 흐르고 있다. 2010년 아이패드는 태블릿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60%를 넘지 않는다. 안드로이드 태블릿들 때문이다.

애플 팬들이 제일 걱정하고 있는 바는 애플의 방향일 것이다. 잡스가 2011년 10월 서거했을 때 뭣보다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은 팀 쿡이 그를 계승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구라도 잡스를 이어 받을 수 있겠느냐였다. 잡스가 애플에 있을 때 애플은 혁신 머신이었다. 3년~5년마다 혁명적인 제품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전기작가인 월터 아이잭슨(Walter Isaacson)에 따르면 잡스는 TV 혁명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쿡의 애플은 아직 그런 제품을 선보이지 않았으며, 투자자들의 불안감도 그만큼 뚜렷해졌다. 애플 제품 발표는 으레 주가를 올렸었다. 9월 쿡이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 5c와 아이폰 5s를 발표했을 때 애플 주가는 10% 하락했다. 1년 전, 애플 주가는 주당 $702어서 애플이 세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기업이 됐지만 현재는 정상(頂上)에 있을 때보다 25% 하락한 상태다.

물론 스티브 잡스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 2년째 지나가면서 애플 CEO 쿡은 잡스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되새겼다. 잡스는 그에게 잡스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하지 말고, 쿡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행하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 아이폰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범상치 않은 힘, 도대체 복제해낼 수 없는 한 사내와 모든 것이 관련돼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아이폰을 선보이기로 한 결정은 분명 도박이었다. 잡스는 새로운 종류의 휴대폰(애플이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그 휴대폰은 잘 작동하지도 않는 프로토타입이었다. 비록 아이폰의 실제 판매는 6개월 후부터였지만 잡스는 세상이 곧바로 아이폰을 갖고 싶어하기를 원했다. 사실 작업이 더 필요한 부분은 실로 방대했다. 생산 라인도 세워야 했고, 화면과 플라스틱 접합 부분의 눈에 띄는 차이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으며, 화면상의 흠집도 발견됐었다. 게다가 휴대폰용 소프트웨어가 버그 투성이었다.

아이폰은 노래나 영상의 일부를 재생할 수 있었으나, 전체 클립을 안정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메일을 보낸 후의 웹서핑 정도는 괜찮았지만, 그 반대 순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래서 엄청난 시도와 실수 끝에 엔지니어들이 일컫는 "골든 패스(golden path)"가 만들어졌다. 특정 방식으로 특정 순서에 따라 아이폰을 움직여서 마치 아이폰에 버그가 없는 양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잡스가 골든 패스를 따랐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아이폰에 대한 손질이 필요했다. 발표 당일, 그리 고의 라디오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와 아이폰 메모리 관리 소프트웨어에는 버그가 여전했다. 게다가 잡스가 시연용으로 별도로 한 요구 때문에 문제는 더 악화됐다.

잡스는 무대 위에서 사용할 시연용 아이폰 화면을 자기 뒤의 대형 화면에 그대로 미러링 시키기를 원했다. 큰 화면에 기기를 비추기 위해, 기업들 대부분은 비디오 카메라를 제 위치에 붙이곤 하지만, 잡스는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 경우 조작하는 손가락이 보이기는 해도, 프레젠테이션의 외양을 망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잡스는 애플 엔지니어들에게 서킷 보드와 아이폰용 비디오 케이블을 고쳐서 무대에 그대로 시연이 가능토록 명령했다. 당시는 프로젝터에 비디오 케이블이 연결됐기 때문에 잡스가 아이폰의 달력 앱 아이콘을 터치할 경우 손가락은 나타나지 않고, 손가락의 명령에 반응하는 큰 화면 이미지가 무대 뒤에 떴다. 효과는 마술 같았다. 청중은 자기 손에 실제로 아이폰을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 아이폰의 다른 큰 문제점을 고려해 보면, 오류 없이 설정하기가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폰의 와이파이 라디오 소프트웨어는 너무나 불안정해서 그리  과 그의 팀은 아이폰의 안테나를 무대 뒤의 전선에 연결 시킬 정도로 확대했다. 무선 신호의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해당 주파수에 대한 접근은 금지됐다. 그의 말이다. "심지어 베이스스테이션 ID을 숨긴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러니까 노트북의 무선 신호에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조연설 청중 5천명이 다 컴퓨터 광들입니다. 어떻게 신호를 해킹할 방법을 알아내겠죠." 그래서 그는 에어포트 소프트웨어를 수정하여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운영하는 것인 양 만들었다. 미국에서 허용 안되는 주파수를 일본 와이파이가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잡스가 무대 위에서 할 전화 송신이 잘 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  과 그의 팀은 좋은 신호가 잡히기만을 기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폰용 통신사인 AT&T가 휴대용 통신탑을 가져왔기 때문에 신호 자체는 강력할 터였다. 잡스의 결재에 따라 그들은 신호 강도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막대가 실제 강도와는 관계 없이 언제나 다 채워지도록 했다. 90분의 기조연설 중 잡스가 전화기를 사용하는 동안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았지만 어느 때라도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높았다. 그리  의 말이다. "우리 의심대로 만약 라디오가 충돌돼서 재시작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실제 막대바를 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하드코딩을 하여 항상 다섯 개 막대가 보이도록 해 놓았죠."

그런데 아이폰 최대의 문제, 한 번에 몇 가지 이상 작업을 할 때 메모리 부족으로 재시동된다는 문제는 해결책이 없었다. 잡스는 이 문제의 관리를 위해 무대 위에 몇 가지 시연용 아이폰을 다 갖고 올라갔다. 한 기기의 메모리가 낮아진다면 첫 기기가 재시작할 동안 다른 기기로 바꿀 요량이었다. 그렇지만 잡스가 계획한 시연이 몇 가지 있었기에 그리  은 실패할 잠재적 시점이 너무 많다고 우려했다. 10여 가지 중 한 가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폰 최고의 기능이 같은 폰에서 같은 순간 일어나는 피날레 중에는 반드시 잘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음악을 재생하고 전화를 하며, 한 통화를 그대로 두고 다른 통화를 하고, 검색 및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면서 첫 번째 통화자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음악으로 돌아간다는 순서였다. 그리  의 말이다. "저와 팀원들 너무나 조바심을 가졌어요. 당시 시연용 아이폰 메모리가 128 메가바이트 뿐이었습니다. 128 메가바이트라면 커다란 디지털 사진 20여장 정도였어요. 아직 마감이 안 됐기 때문에 모든 앱에 버그가 여전했습니다."

잡스가 원래 배수의 진을 치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관리 감독으로 잘 알려졌으며, 직원들을 어떻게 몰아서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케 하는지 아는 인물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안 됐을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당시 애플에서 작업하고 있었던 유일한 멋진 무언가는 아이폰 뿐이었다. 아이폰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프로젝트였으며, 백업 계획도 없었다. 그리  의 말이다. "애플 TV나 아이폰이었습니다. 만약 맥월드에 애플 TV만 선보여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이튠스와 텔레비전에 연결되는 신제품만으로는 도대체 뭔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반응을 얻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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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커리어에서 최대의 순간이 파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  은 위통을 겪을 정도였다. 2007년까지 그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애플이나 애플 제휴사에 두고 있었다. 아이오와 대학교에 다닐 시절인 1993년 그와 친구인 와일드(Jeremey Wyld)가 뉴튼 메시지패드를 재-프로그래밍하여 인터넷 무선 연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을 때도 그랬다. 뉴튼은 비록 제품으로서 성공하진 않았지만, 뉴튼을 최초의 주류 휴대용 컴퓨터로 간주하는 시각은 여전히 많다. 그리  과 와일드의 해킹은 그 시절 상당한 위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애플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와일드는 실제로 뉴튼 팀에 들어갔다. 그리 고은 애플의 그 유명한 진보기술그룹(Advanced Technology Group)에 들어가서 화상회의 기술을 다뤘다.

2000년 그리 고은 전직 애플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설립한 Pixo로 옮겼고, 그곳에서 휴대폰 외 소형기기용 운영체제를 작업했다. 2001년 최초의 아이포드에 Pixo가 들어가자, 그리 고은 다시금 애플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Pixo에서의 작업 덕분에 그는 화상회의 기술 말고도 컴퓨터 라디오 트 랜스미터(와이파이와 블루투스), 그리고 휴대폰과 같은 휴대기기용 소프트웨어 작업이라는 유망한 분야 두 곳의 전문가가 돼 있었다. 그리 고은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살고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대부분은 그들의 코드가 하드드라이브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거나 칩에 과부하를 준다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데스크톱과 노트북 컴퓨터 하드웨어는 강력하고 수정이 자유로우며 저렴했다. 메모리와 하드 드라이브, 심지어 프로세서도 저렴하게 업그 레이드할 수 있었고, 벽의 전원이나 거대한 배터리에 컴퓨터를 연결해서 사용하던 때였다. 그리의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는 고정돼 있었다. 너무 큰 코드는 돌아갈 수 없었고, 특히나 노트북이라면 몇 분 정도 밖에 못 버틸 소형 배터리에는 하루 내내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이폰 작업 시작은 2004년 말에 이뤄졌으며, 그리 고은 프로젝트 초기 엔지니어가 될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2007년, 그는 심정적으로 지쳤다. 몸무게도 50 파운드가 늘었다. 결혼때문이라 강조하지만 말이다. 아이폰 팀은 애초부터 휴대폰 만들기가 컴퓨터나 아이포드 만들기와는 전혀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었다. 그리 고의 말이다.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애플에서 나올 차세대 빅 히트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심겨졌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모든 영리한 인물들을 매우 좁은 방 안에 다 집어 넣었죠. 그런 압박 하에 미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울정도로, 잡스는 이미 전화기 한 번 만들어 보라는 설득을 받아 왔었다. 전화기는 잡스의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 주제 중 하나였고, 애플이 아이포드를 만들었던 2001년부터 계속 제기돼 왔었다. 개념은 분명했다. 소비자들이 이메일과 사진, 음악용 기기로 하나를 원하지 두 세 개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잡스와 그의 경영팀이 그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알아볼 때마다 전화기 제조는 자살에 가까웠다. 휴대폰용 칩과 속도는 너무나 느려서 인터넷이나 음악, 영상 다운로드를 휴대폰 통신망으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메일 정도만 전화기에 붙일 만했지만 RIM의 블랙베리가 이미 그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뭣보다 잡스는 무선 통신사 그 누구하고도 파트너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통신사들이 당시 휴대폰 업체와의 파트너십을 지배했으며, 그들이 통신망을 갖고 있기에 모든 것이 그들 마음이었다. 유명한 통제광으로서 잡스는 통신사에게 휘둘린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03년 모토로라 인수를 생각했다가 결국 당시 애플로서는 인수하기에 너무나 크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었다. (몇 년 후, 애플과 모토로라는 협력을 하기는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 가을, 통신사와의 사업 얘기가 좀 통하기 시작했다. Sprint는 통신망을 도매로 팔기 시작했으며, Sprint로부터 광대역을 사들였다가 되팔면 애플도 통신사("가상 이동망 사업자(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전화기를 만들어서 통신사와 논의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잡스 자신이 이사로 앉아 있는 디즈니는 이미 자사의 무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Sprint와 협상중이었다. 잡스는 애플도 이동망 사업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대단히 많은 질문을 했다. 결국 애플은 Cingular(후에 AT&T가 인수한다)와 2006년,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그러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 계약은 아이폰 자체를 만들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수많은 간부와 엔지니어들은 아이포드의 성공으로 한껏 고양돼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 만들기는 조그마한 매킨토시 만들기와 비슷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대신 애플은 2005년과 2006년, 세 가지 별다른 버전의 아이폰을 디자인했었다. 모 프로젝트 관련자에 따르면 애플은 당시 실제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을 6가지 만들어 놓았다.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이 각기 달랐다. 온힘을 다 쏟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폰이 실제 판매에 들어간 후, 회사를 나간 경우도 있었다.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이었던 터니 포델(Tony Fadell, 그도 2010년 Nest라는 자기 회사를 차렸다)의 말이다. "최초의 달 착륙과 비슷했습니다. 저도 이골이 나 있었습니다만, 새로운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만 있을 수 없더군요."

잡스는 아이폰에 수정된 버전의 오에스텐(모든 맥에 탑재돼 있다)이 들어가기 바랬다. 그렇지만 아무도 오에스텐과 같은 거대한 프로그램을 휴대폰 칩에 올려 놓을 시도를 하지 않았었다. 오에스텐을 거의 1/10로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코드 수 백만 줄을 없애거나 다시 작성해야 했으며, 칩이 2006년에나 나왔기에 엔지니어들은 칩 속도와 배터리 수명을 시뮬레이션하여 작업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소비자용 제품으로 멀티터치를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정전식 터치 기술(손가락이나 전도성 물체가 하는 "터치") 1960년대부터 있었다. 단 손가락 두 세 개를 사용하되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정전형 멀티터치는 훨씬 더 복잡했다. 연구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으며, 애플이 아이폰에 터치 화면을 넣고 대량 생산하는 것이 큰 도전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감히 아무도 그런 데에 대량 투자를 할 자가 애플 말고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기술을 유리 안에 집어 넣어서 자동 수정이 이뤄지는 가상 키보드를 뜨게 하고 사진과 웹 페이지를 부드럽게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도 문제였다. 즉, 제대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기가 대단히 비쌌다. 그런 멀티터치 화면을 대량 생산한 경험이 있는 생산라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비자용 전자제품에서 터치스크린은 보통 스타일러스나 손톱을 통해 조작하는 감압식이 대세였다. (Palm Pilot과 Palm Treo같은 기종들이 이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설사 멀티터치 아이폰 화면을 만들기 쉽다 하더라도, 화면상 키보드나 "탭으로 확대하기" 등과 같은 기능이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일지에 대한 확신도 분명치 않았다.

2003년 초, 애플 엔지니어들은 태블릿에서 멀티터치를 어떻게 구현할지 알아냈다. 당시 프로젝트 참여자 중 하나였던 스트리콘(Joshua Strickon)의 말이다. "스티브는 화장실에 있을 때 이메일을 볼 수 있는 장비를 원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제품 사양이었죠. 하지만 충분한 배터리 없이는 만들 수 없었습니다. 유용하도록 충분한 그래픽 성능을 낼 칩도 구할 수 없었죠. 뭘 할지 일단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매우 많이 보냈습니다." 2003년 애플에 들어오기 전, 스트리콘은 MIT 석사 논문을 위해 멀티터치 장비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애플 내부부터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프로토타입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2004년 그 기술 갖고 애플이 아무것도 못하리라 예상한 채 애플을 떠났다. 

당시 애플의 수석 간부진 중 하나였으며 애플 내 최대의 멀티터치 옹호자였던 부커(Tim Bucher)는 프로토타입이 사용한 소프트웨어인 오에스텐이 손가락이 아니라 마우스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프로토타입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맥미니와 비슷한 10인치, 혹은 12인치 화면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다른 멀티터치 제스처를 이 화면에서 돌려야 했죠. 한 시연에서 키보드 애플리케이션이 밑에서 나오는데 2년 후에 나올 아이폰과 대단히 유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쁘지가 않았어요. 무슨 선을 감은 것 같았어요."

잡스가 2005년 중순, 멀티터치 아이디어를 강하게 추진하기 전까지, 터치스크린 기술이 새로운 종류의 휴대폰의 핵심 기술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퍼델의 말이다. "잡스가 한 번은 제게 이리 와 보라더군요. 작업하는 것이 있는데, 무슨 생각이냐, 우리가 이걸로 휴대폰을 만들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 이어졌어요. 잡스가 가리키고 있는 시연을 보니까 거대했어요. 방을 다 채울 정도였죠. 천장에 프로젝터가 달려 있었고, 이 프로젝터는 맥 화면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한 3이나 4 스퀘어피트 정도 됐을까요. 맥 화면을 터치해서 물체를 움직이거나 그릴 수 있었습니다." 퍼델은 터치스크린 프로토타입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몰랐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맥 제품이기 때문이었고, 그는 아이포드 책임자였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앉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논의를 시작했죠."

퍼델은 그토록 거대한 프로토타입을 휴대폰을 줄이고, 또 대량생산까지 할 수 있을지 강한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기보다 더 알고 있었다. 그는 애플의 수퍼스타 중 하나였으며, 최초의 아이포드 제작을 돕기 위해 애플에 2001년에 처음, 고문으로 들어왔었고, 골치 아픈 기술적 문제 앞에 소심한 인물이 아니었다. 2005년까지는 아이포드 판매가 치솟았고, 이제 36세인 그는 이제 애플 내 간부진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 돼 있었다. 그의 말이다.

"어떻게 할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방을 다 채울 정도로 거대한 특별한 기기를 작게 만들고, 그것을 또 백만 대 수준으로 비용-효율적이면서 신뢰감 있는 생산이 가능할지가 고려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 목록부터가 아주 길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유리 기술이 있는 LCD 업체에 가서 그들 라인에 남는 시간이 있는지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터치스크린을 만드는 픽셀 전자의 알고리즘을 보정하고 보상하는 알고리듬도 알아 봐야 하죠."

"즉, LCD가 우선 문제였습니다. 터치스크린 기기를 만들기 위한 전체적인 프로젝트였어요. 실제로 터치스크린을 만들 두 세 가지 방법을 고려해 봤습니다만,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이어야 했습니다."

오에스텐을 줄이고 멀티터치 스크린을 제조하기란 혁신적이기는 해도 어려웠다. 적어도 기업으로서 애플이 당시 갖고 있던 기술로는 말이다. 오에스텐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서 집어 넣어줄 회사는 애플 말고 없었다. 액정이야 모든 노트북과 아이포드에 LCD를 넣으니 LCD 업체들을 애플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휴대폰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그리고 2006년 아이폰 작업을 하고 나서야, 애플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애플은 실험실과 장비를 지어서 아이폰 안테나를 테스트했다. 인간 머리 모형도 만들고 인간 두뇌를 모방하기 위해 끈적거리는 것까지 머리 모형 안에 집어 넣었다. 전자파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한 수석 간부는 최초의 아이폰을 만드는 데에만 들어간 비용이 1억 5천만 달러를 넘었으리라고 관측했다.

잡스는 아이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실제 제품화된 것과 유사한, 오에스텐을 돌리는 터치 스크린형 아이폰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렇지만 2005년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애플 최초의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잡스가 실제로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장난 삼아 보여줬던 다이얼 달린 아이포드에 더 가까웠다. 그리 고의 말이다. "시장에 내보낼 쉬운 방법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처럼 쿨하지는 않았죠."

두 번째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2006년 초에 나왔으며, 잡스가 실제로 선보인 것에 훨씬 가까운 형태였다. 터치스크린과 오에스텐이 들어갔지만, 브러시드 알루미늄으로 제조했었다. 잡스와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는 알루미늄 디자인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들 둘 다 라디오 전파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며, 그들이 아름다운 벽돌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라디오파는 금속을 잘 통과하지 못한다. 2008년에 애플을 떠난 엔지니어인 키어니(Phil Kearney)의 말이다. "저와 애플의 안테나 전문가인 카발레로(Ruben Caballero)가 이사진 방에 올라가서 스티브와 아이브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금속을 라디오파가 통과 못 한다고요. 설명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디자이너들 대부분은 예술가이거든요. 그들이 공부했던 과학은 중2때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애플에서 권력자는 디자이너에요. 그래서 '라디오파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라고 질문들 합니다. 왜 안 되는지 설명을 해 드려야 하죠."

당시 애플의 하드웨어 책임자였던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은 전화기 크기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매우 길었다고 말했다. "저는 아이포드와 마찬가지로, 아이폰과 아이폰 미니, 두 가지로 나와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하나는 스마트폰으로, 하나는 그냥 전화기로 하면 된다 여겼거든요. 그렇지만 작은 쪽은 주목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서는 하나에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야 했어요."

아이폰 프로젝트는 너무나 복잡해서 애플 전체에 위협을 가할 때도 종종 있었다. 애플 내 수석 엔지니어들이 아이폰 프로젝트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다른 일의 시한을 늦춰야 할 때가 발생해서였다. 아이폰이 애플을 다 덜어내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애플은 당시 대규모적인 제품 발표를 아이폰 외에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이폰 프로젝트의 한 수석 간부에 따르면 아이폰이 실패할 경우, 애플의 수석 엔지니어들이 실패 때문에 좌절하여 애플을 떠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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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기술적 난관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잡스의 비밀주의였다. 주당 80 시간을 일하는데 지쳤어도 아이폰을 작업하는 수 백 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은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친구들과 바에서 대화하거나, 배우자에게 얘기하는 장면을 애플이 본다면, 곧바로 해고도 가능했다. 혹시 한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싶냐고 물어볼 때, 현재 속한 팀 사무실 내에서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비공개 서약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그 프로젝트가 뭐냐고 물어 보면, 별도의 비공개 서약에 서명을 하여 프로젝트가 뭔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서류를 다시 만들어야 했었다. 지난 10월까지 애플 iOS 소프트웨어 책임자이자 수석 부사장이었던 스콧 포스탈의 말이다. "아이폰 빌딩인 자주색 빌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인을 해야 했어요. 거기는 '파이트 클럽'이라 불렸습니다.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규칙은 아무에게도 파이트 클럽을 얘기하지 않는다였잖습니까." 

포스탈은 2012년 애플 대 삼성 재판에서 증언도 했었다. "스티브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작업을 위해 애플 외부 고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회사 내부에서 고용을 하라 일러뒀죠. 그래서 저는 몇 사람 제 사무실로 불러서 앉힌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네들이 현재 역할에서 수퍼스타들인 셈인데,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여러분이 고려해 주기 바라지만 그것이 뭔지 알려 줄 수는 없다.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퇴근과 주말을 포기해야 하며, 다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초기 아이폰 엔지니어의 말이다. "와아피이 라디오 칩은 Marvell에서, 블루투스 라디오 칩은 CSR에서 만들었죠. 그들도 자기네들이 뭣 때문에 칩을 공급하는지 몰랐었어요. 그저 새로운 아이포드를 만들겠거니 여겼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짜 도해와 가짜 디자인을 제공했었어요. 그런데 아이폰 다음 날 다들 말하는 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그리 고은 애플이 심지어 출장가는 직원들 회사를 바꿔서 출장 보낼 때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Cingular로 갈 때 그랬다. "프론트나 우연히 만날 모두가 애플이라는 이름을 안 보기를 원했죠."

비밀주의에 대한 잡스의 집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있다. 애플 본사 내의 폐쇄된 구역이다. 아이폰 참여자가 아니면 아예 갈 수가 없는 구역이다. 그리 고의 말이다. "스티브가 이런 걸 좋아했습니다. 부서 만들기를 좋아했죠. 하지만 거대한 [욕설 삭제] 뭔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회사 내 록스타들이 저기 다 모여 있는 거 뻔히 알지만 보려고 가 보면 당신은 접근권이 없다고 못 들어가는, 그런 식이었죠. 느낌은 안 좋았습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 스스로도 서로 간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전자 부문을 디자인하는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를 볼 수 없었고, 테스트를 위해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경우, 실제 코드가 아니라 프록시 코드를 받았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를 작업한다면 하드웨어 성능 평가를 위해 시뮬레이터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조너선 아이브가 있는 2번 빌딩의 1층이 있다. 잡스의 최측근들 말고는 누구도 그곳을 방문할 수 없었다. 아이브의 프로토타입을 둘러싼 보안은 너무나 엄격해서, 들어가려 할 때 인증을 못 받으면 곧바로 보안 요원이 들이닥치리라고 믿는 직원들도 있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받은 첫 번째 임무가 아이폰이었던 한 엔지니어의 말이다. "피할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했습니다. 로비 바로 앞에 거대한 금속문이 달려 있어요. 지금이나 그 때나 문이 열려 있으면 들여다보려 할 겁니다만, 그 이상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포스탈은 증언하는 동안 "카드 기록"을 4번 해야 하는 연구실이 있다고 말했다.

잡스의 시한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나 강해서 평범한 토의도 이내 싸움박질로 변하기 일쑤였다. 기진맥진한 엔지니어들은 일을 그만 뒀다가 잠 좀 자고 며칠 후에 다시 출근하곤 했다. 포스탈의 보좌 수석이었던 보랏(Kim Vorrath)은 한 번 너무나 문을 세게 닫는 바람에 아예 방에 갇혀 버린 적이 있어서, 동료들이 한 시간도 넘게 그녀를 꺼내 주려 한 적도 있었다. 그리 고의 말이다. "우리 모두 서서 지켜 봤었죠. 재미있기도 했지만, 일단 물러서서 [욕설 삭제] 도대체 뭔지 알아야 하기도 했으니까요."

2007년 1월 9일, 잡스가 아이폰을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2년 반 동안 꿈꿔 왔던 날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비자들이 어째서 자기 휴대폰을 싫어하는지 잔뜩 이야기를 들려 줬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모든 문제를, 분명히 풀어냈다고 말했다. 

잡스가 아이폰으로 음악과 영상을 재생하고 아이폰의 아름다운 화면을 보여줬을 때, 그리 고과 다른 이들은 청중 속에서 초조해 하며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발명해낸 주소록과 보이스메일을 보여 주며 전화를 걸었고,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으며, 터치-스크린 키보드가 얼마나 타자 치기에 쉬운지도 보여줬다. 그는 여러 사진을 스크롤 하면서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크게, 작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보여주고, 뉴욕타임스와 아마존 웹사이트를 보여 주면서 아이폰용 인터넷 브라우저가 자기 컴퓨터의 브라우저만큼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구글 지도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하고는 무대 위에서 스타벅스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폰이 없으면 왜 안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이 되자 그리 고은 안도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예 그는 취했다. 스카치 한 병을 사서 자신의 초조함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다. "엔지니어, 관리자 등 우리 모두는 다섯 번째 열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연이 끝날 때마다 스카치 한 잔씩 했죠. 대 여섯 명 쯤 있었을 겁니다. 시연이 한 번씩 지날 때마다 해당 기능 책임자가 원샷 했어요. 마지막이 되자 우리는 스카치를 다 비웠습니다. 모두가 잘 흘러갔고, 정말 우리가 봐 온 시연 중 최고였어요. 나머지는 그냥 전체 아이폰 팀에게는 [욕설 삭제] 날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도시에서 하루 내내 마시며 보냈어요. 엉망진창이었지만, 정말 근사했습니다."

Fred Vogelstein is a contributing editor for Wired. His book “Dogfight: How Apple and Google Went to War and Started a Revolution” will be published in November.

Editor: Dean Robinson

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s in print on October 6, 2013, on page MM36 of the Sunday Magazine with the headline: AND THEN STEVE SAID, ‘LET THERE BE AN iPHONE’.

http://www.nytimes.com/2013/10/06/ma...nted=all&_r=3&;

전문 번역은 애플포럼의 casaubon님
http://www.appleforum.com/mac-column/61993-%EC%8A%A4%ED%8B%B0%EB%B8%8C%EA%BB%98%EC%84%9C-%EA%B0%80%EB%9D%BC%EC%82%AC%EB%8C%80-%22%EC%95%84%EC%9D%B4%ED%8F%B0%EC%9D%B4-%EC%9E%88%EC%9C%BC%EB%9D%BC%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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